'2006/11/20'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6/11/20 역사에 남은 농담 (13)
  2. 2006/11/20 우리 과장님 (4)
  3. 2006/11/20 가난 (10)


미국의 아폴로 계획에 의해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내딛은 우주 비행사, 닐 · 암스트롱.

그가 처음으로 달 표면에 내려섰을 때, 그가 말한 것은 사실 그 유명한「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 있어서는
작은 한 걸음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 있어서는 큰 비약이다」라는 명언 뿐만이 아니었다.

그 말을 한 이후에도 동료 우주비행사나 관제 센터와 여러가지 교신이 있었다. 그리고 착륙선으로 돌아오기
전, 암스트롱은 수수께끼에 쌓인 이런 말을 남겼다. 

「행운을 빌어요, 미스터 고르스키」

당시 그 말에 대해서 사람들은 소련의 라이벌 우주비행사가 문득 떠올라서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사해보자, 소련에 고르스키라는 이름의 우주 비행사는 없었고, 미국 측 비행사 중에서도 그런 이름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행운을 빌어요, 미스터 고르스키」의 의미는 무엇인가, 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물었지만 닐은 단
한번도 그 질문에 답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1995 년 7 월 5 일, 플로리다의 템파베이에서 있었던 강연 도중, 질의응답 시간에 어느 리포터가 그
26년 전 질문을 또다시 암스트롱에게 던졌다.

그리고 그 때, 닐이 드디어 그 질문에 대답했다.

아마 지금쯤은 미스터 고르스키가 죽어서, 이제는 이 질문에 답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질문의 답은 이렇다.


어릴 적, 닐이 뒷마당에서 형과 야구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형이 던진 공이 이웃집의 침실 창문 곁에 떨어
졌다. 그 때 그 집에 살고 있던 것이 고르스키 부부였다.

닐이 볼을 주우려고 몸을 굽혔을 때, 창문 너머로 고르스키의 부인이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뭐라구요 당신? 오럴섹스요? 입으로 하고 싶단 말이에요? 오우, 당신. 설마 그런 일을 내가 해주리라고
정말로 생각하는건 아니죠? 좋아요, 옆집 애가 달나라에라도 가면 해줄께요. 오호호, 그러니 꿈깨요」

우리 과장님

5ch 컨텐츠 2006/11/20 21:36


나의 직속상사(과장)는 과묵, 무표정. 잡담 따위는 일절 하지 않으며, 술도 마시지 않고, 사람들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실 공평하며, 그 어느 때라도 냉정해서 믿음직한 상사입니다만,
너무 딱딱해서 접근하기 어려운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런 과장의 책상 위에는 부인, 아이 네 명과 찍은 사진이 장식되어 있어서, 곧잘 저는

「그 벽창호같은 사람이 가족은 끔찍히 챙기네」하며 미소짓곤 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 같은 사진이 장식해 있었으므로, 그 이유를 물어 보자,

「제일 좋았던 시절 사진이니까」라며 수줍은 웃음을 띄우면서 대답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내가 본 유일한 과장의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런 성실하고 완고한, 입사 이래 무지각 무결근의 과장이 3일 계속으로 무단 결근. 집에 전화해도 아무도
받지 않고, 친척의 연락처같은 것도 몰랐기 때문에, 저와 부장님이 함께 직접 과장의 맨션을 방문해 관리인
씨에게 부탁해 문을 열었습니다.

과장은 현관에 쓰러져 있고, 이미 차가와져 있었습니다. 급성 심부전증이었다고 합니다. 부장이 관리인에게
과장의 가족이 언제 돌아오느냐고 묻자,「00씨에게는 가족이 없어요」라는 대답.

당황해서 인사부의 자료를 살펴보자, 확실히 과장에게는 가족이 없었습니다. 과장은 10년 전에 입사한 사람
이므로 그 이전에 이미 가족과 헤어져 살았던 것입니다. 그 사진을 보고 행복했던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해, 조금 슬펐습니다.

결국, 과장의 장례식에도 가족이나 친척은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고 하고, 저는 그 가족들의 차가움에 더 슬퍼
졌습니다.

얼마 뒤 저는 과장의 성묘를 갔습니다. 그러자 그 곳에는 훌륭한 묘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죽어서야 겨우
가족과 화해한 것일까, 그래도 훌륭한 묘를 세워주었구나 하고 안심하고 묘비를 바라본 저는 아연실색했습
니다. 그 묘는 오래된 것이었고, 과장과 같은 성씨의 이름이 묘비에 몇 개 새겨져 있었습니다. 과장 이외에는
전원 수십 년 전 같은 날에 죽었던 것입니다. 무언가의 사고였겠지요.

가족을 사고로 한 번에 잃고 난 후 수십 년의 세월을, 그는 어떤 기분으로 지내왔던 것일까?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가족의 사진을 어떤 생각으로 매일 바라보던 것일까?
사람을 멀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결코 말하지 않았던 과장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가난

5ch 컨텐츠 2006/11/20 21:23


이제는 다 지나간 어릴 적 이야기지만 난 모자 가정에서 자라나 가난했기 때문에, 남들이 다 하나씩
같고 있던 패미컴 오락기 따위는 살 수 없었다. ..
-정말로 부러웠다, 가지고 있는 녀석들이.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반의 급식비가 없어졌을 때는,「가난한 녀석이 제일 용의자 아니겠어?」라는 식으로
제일 처음 의심받기도 했었고,「가난한 집에 태어날 바에야 차라리 태어나지 않으면 좋았을걸!」 같은 심한 욕을
했을 때의 어머니의 슬픈 눈,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난 그 오락기가 너무나도 갖고 싶어서, 중학교 때 신문 배달로 돈을 모았다. 드디어 이제 나도 오락기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게임 판매장 앞까지 갔다가 그만두었다. 그 대신 초등학교 3학년 여동생에게 아식스
점퍼를 사주었다. 지금까지 낡은 내 옷을 물려받아 입고 있었으니까.

어머니에게는 핸드크림을 사드렸다. 언제나 손이 거칠었으니까. 작년에 난 결혼했지만 결혼식 전날, 어머니는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이미 녹슨 그 핸드크림 통을 꺼내보여주셨다.

울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했다.「낳아 주셔서 고마워요」라고.

뭐, 급식비 훔친 것은 나 맞지만.